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원균의 2차 출정: 가덕도 해전 === 이후 원균은 앞서 이순신이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곳으로 바꾸어, 사령관들의 신망을 잃게 된다. 3월 29일, 조선 조정에 [[원균]]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4, 5월 사이 육로와 수로에서 남해안 왜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가덕포와 안골포, 죽도, 부산의 왜군이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특히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은 3, 4천명에 불과했다. 그의 표현으로 “만약 육군이 몰아낸다면 수군이 대를 쪼개듯 쉽게 섬멸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의 추산대로라면 조선의 군사는 정병 30여만 명을 동원할 수 있고, 늦봄으로 땅이 단단하여 말들이 잘 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균의 방안은 외견상 육군과 수군의 동시출병이었으나, 사실상 육로에서의 선제적 조치를 강조했다. 이는 통제사 되기 직전에 올린 상소에선 해로차단 전술을 주장한 것과 달리 수륙병진 전술로 변경한 것이었고 이 같은 내용의 장계에 대해서도 조선 조정은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하였으나 비변사와 이원익, 선조는 성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현장의 도원수 [[권율]]에게 판단을 일임했다. 4월 30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측 기록에 따르면 4월에 일본 병선 수천 척이 대마도에서 부산을 향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 수백 척이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진격해서 가로막고자 했다. 이때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 조선 수군이 결국 거제도로 되돌아갔다.[* 『정한위략(征韓偉略)』 卷四, 二十三.] 5월 초 [[도도 다카도라]]가 부산에 도착했고, 5월 22일에는 전 군대가 오사카를 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통해 6~7월 호남진격설을 흘렸다. 실제로 6월이 원래 목표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7월 보름부터 일본군이 움직였다. 5월 8일, 조선 조정에 도원수 [[권율]]의 보고가 올라왔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 때문에 조선 수군이 고단한 것은 원균의 주장과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내용이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5008_005|#]] 5월 12일, 권율은 조선 수군에 의한 공격을 강조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는 그간 경험으로 육상에서와 달리 조선 수군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균은 이전 장계에서 육상에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선제공격을 전제로 했던 만큼, 특히 수군 단독의 공격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원균 자체의 역량 문제이기도 했으나 조선 수군은 당시에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군 역시 대응책을 충분히 준비했던 만큼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를 두고 [[비변사]]가 전략을 제시한다. 수군을 3등분 하여 절영도까지 오가며 계속 강습 타격하는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일본군이 군량미 및 군인이 넘어오기 곤란해질까 두려워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전략이었다. 다만 이는 수군이 한산도~부산포 사이의 중간 정박 지점이 고착화되어 일본 육군의 습격을 받을 수 있어 이뤄지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5012_003|#]] 6월 10일, 도체찰사로 나가 있는 우의정 이원익이 전략을 제시하여 받아들여진다. 수군을 2등분하여 절반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키고, 절반을 이끌고 부산포 쪽을 강습하면, 안골포-가덕도가 부산포로 나간 선박들의 배후를 치려 해도 한산도의 군세가 이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6010_001|#]]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병력 5천 명까지 지원하며 압박을 넣었다.[* 이순신이 통제사일 때는 병사를 지원한 적이 없었고 전술했던 대로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는 원균에게는 지원을 못 해줘서 안달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었다.][* 또한 이는 조선 육군이 1.2만, 수군이 5천 남짓이었음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우의정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등이 종사관 남이공을 원균에게 보내어, 견내량을 지키면서 부산포를 강습하라 명했다. 6월 18일, '''원균이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2차 출정을 나섰다'''. 6월 19일, 안골포(오늘날 [[부산신항]])에 이르러 적에게 포격하면서 적선 두 척을 빼앗았다. 일본 수군들은 포격에 배를 버리고 해안으로 가서 포를 쏘다가, 조선 수군이 빠지자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 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쳤다. 오후, 조선 수군이 가덕도 방면으로 더 나아가자 안골포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일본 수군과 정면대결을 펼쳐 양측이 피해를 입었다. 조선 측은 평산포만호 김축이 눈 부상을 당했고,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칠천량으로 돌아왔다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